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모 히데오 (문단 편집) == [[박찬호]]와의 관계 == [[파일:park_nomo.jpg]] 국내에서는 [[박찬호]]의 라이벌로 많이 취급을 받았다. [[한일관계]]의 특수성에, 3년이나 같은 팀에서 한솥 밥을 먹은데다가, 노모의 1차 하락세가 박찬호의 전성기와 묘하게 맞물려서 더욱 그렇게 여겨졌다. 2010년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두고 한일 양국의 스포츠 팬들이 신경전을 벌인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필 등번호도 16과 61로 뒤집으면 똑같다. '''박찬호나 노모 히데오나 동양인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라는 것을 최초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두 선수는 각국 야구계의 [[레전드]]라고 추앙받을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일본에서 5년 간 1000이닝을 던진 후 만 27세(한국나이 29세)에[* 놀랍게도 [[스즈키 이치로]]랑 메이저리그 데뷔 나이가 같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모든 승을 선발승으로 따낸 노모와, 아마시절에 스카웃된 뒤 메이저 팜에서 키워져 만 21세에 데뷔한 박찬호의 출발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역으로 미국의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서는 노모, [[사사키 카즈히로]], [[스즈키 이치로]] 등 일본에서 정점에 오른 뒤 비교적 늦은 나이로 메이저에 데뷔하는 선수들이 [[신인왕]] 타이틀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여론이 많아졌다. 이는 후에 [[마쓰이 히데키]]가 신인왕 수상에 실패하는데 큰 이유가 됐으며 이후 일본 선수들도 신인왕 투표에서 상당히 불이익을 받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다르빗슈 3위(war 2위), 마쓰자카 4위(war1위) 등} 그러다 2018년에 들어서 [[오타니 쇼헤이]]가 양키스의 안두하와 더불어 유력한 신인왕 후보가 되었는데 오타니가 성적이 제일 뛰어남에도 양키스쪽이 그럼 마쓰이는 왜 안줬냐는 식으로 들고 일어났고 양키스쪽 기자들도 오타니에게 투표하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오타니가 수상에 성공한다.] 박찬호는 불같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했고 노모는 포크볼을 주무기로 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선수 모두 삼진 잡는 기계였다는 공통점까지 있다.[*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노모와 박찬호의 통산성적 유사성 점수(Similarity Score)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와 있다.] 다만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노모는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90마일대로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수직무브먼트가 굉장히 뛰어났다. 거기에 결정구인 낙차 큰 포크볼이 패스트볼의 구위를 뒷받침하면서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탈삼진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 결론적으로 두 선수의 통산 커리어는 한국에서 조차도 노모가 박찬호보다 위라고 평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늦은 나이라는 큰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과하고 기본 투수 비율 지표는 물론이고 WAR과 조정 스탯 등 세이버메트릭스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도 노모가 앞서며, 누적 조차 단 1승등을 제외하면[* 노모의 경우에는 전부 선발승인데 반해 박찬호의 경우에는 말년에 불펜으로 적립한 승리가 꽤 있기 때문에 순수 선발승만 비교하면 오히려 노모쪽이 좀 앞선다.] 탈삼진 등의 클래식 누적 지표 부문에서도 노모가 앞서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아무 타이틀도 없는 박찬호에 비해 노모는 신인왕과 탈삼진왕[* NL(1995)과 AL(2001) 양대리그에서 달성했다.], 노히트 노런 2회[* 역시 양대리그에서 달성했으며, 이는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은 MLB 역사상 4번째로 나온 진귀한 기록이다(이후 [[랜디 존슨]]이 2004년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며 5번째 기록자가 된다). 특히 이 중 첫 번째 노히트 노런은 그 악명높은 '''[[쿠어스 필드]]'''에서 나온 유일한 노히트 노런이기도 하다.] 등 각종 메이저리그 수상과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사이영표도 받아본적 없는 박찬호에 비해 노모는 사이영 투표에서 상당을 족적을 남겼다는 점도 있다. 유일하게 문제라면 '''언론''' ~~[[기레기|기레기들]]~~. 기자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유독 국내 언론들만 노모를 폄하하는 기사를 많이 쓰거나 아예 절대악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에 '''[[박찬호]]의 허락없이 무단으로 출시된'''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라는 책. 이 책을 보면 노모 히데오를 아주 악랄한 이로 매도하면서 마구 깎아내렸는데, 결국 '''[[박찬호]] 측'''이 '''무단 판권 침해, 사진도용, 거짓 글 투성이, 노모 히데오의 명예훼손과 같은 여러 이유로 소송제기'''하면서 전량 회수되어 이젠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대량 회수되기도 했지만, 박찬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98~1999년에 대형할인마트에서 싼 값에 살 수도 있었다.] 거기에 일반 스포츠신문에서 조차 노모를 매도하는 우스개들이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이를 테면 박찬호가 인터뷰에서 노모를 칭하길 "노모는 못해, 노 모어(No More)이니까." 이같은 글이나 우스개[* 오죽하면 [[딴지일보]]가 특집기사를 내면서 박찬호와 노모가 같이 사이좋게 서 있는 사진에 말풍선으로 이런 언론 보도를 비꼬는 기사를 내던 적까지 있다.]라고 올렸다. 이런 여파 때문인지 [[고행석]] 화백이 연재하던 만화 커브에서 도모 히데오라는 일본인 선수가 [[구영탄]]과 [[템파베이 레이스|같은 구단]] 선수로 나오는데 구영탄과 사이나쁘게 나온다. 다만 악랄하게 나오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 과묵하게 성실히 잘하는 타입이고 되려 다혈질 구영탄이 일본인이라고 무턱대고 싫어하는 것으로 나왔다. 다만 국내 언론에서 마구 깎아내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실력 자체를 왜곡하지는 못해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인은 싫지만 노모는 존경한다는 의견을 다수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정작 현실에서 두 사람은 머나먼 이국의 유이한 동양인 선수라는 공통점 덕분에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좋은 동료로 서로를 대해줬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첫 승이 되는 기념구가 경기 종료 후 관중석으로 투척되자 그걸 관중석까지 쫓아올라가 찾아서 박찬호에게 전해준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노모였다. 또한 노모는 [[하와이]]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박찬호의 결혼식에도 초대받아 참석했으며[* 박찬호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하객들은 30여명에 불과했으며 그 중 야구인은 공주고 동기동창 절친이었던 [[홍원기]]와 노모 히데오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박찬호가 자신의 '''비공개''' 결혼식에 초청한 단 두 사람의 야구인 중 한 사람이 노모였다는 사실과, 노모 또한 박찬호의 초대를 받고 하와이까지 날아가서 결혼식에 본인이 직접 참석했다는 사실을 통해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절친한 사이였는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호가 124승을 거두었을 때 "124승은 통과점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승리를 거두길 바란다"고[[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017117|#]]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정작 다음 해 바로 일본으로 갔지만~~ 박찬호도 '노모는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이자 자신이 넘기 위한 목표' 였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노모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NPB를 폭격하고 MLB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였고, 나이도 박찬호보다 다섯 살이나 위다. 노모의 구도자적이며 훌륭했던 인품까지 고려하면,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면 줬지 예민하게 굴었을 리도 없다. 한일관계라는 특수성 때문에 라이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노모는 박찬호에게 팀에 먼저 훌륭하게 녹아든 아시아권의 좋은 선배였다. 일본 매체에서도 박찬호와 노모를 엮어서 별별 얘기가 다 있었을법 한데도 아직까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노모가 어떤 선배였는지는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박찬호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했던 말을 보면[[https://www.youtube.com/watch?v=v135Xpyo1B8|#]], 노모의 ERA, K/9 기록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당사자인 박찬호도 인지하고 있었고, "내가 노모보다 하나라도 앞설 수 있는 건 승수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아시아 최다승 투수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작 승수를 뛰어넘는 순간 굉장히 허무했다고 한다. 왜나하면 오직 승수는 그저 누적으로 쌓이기에 언젠가 없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극찬받던 노모의 123승을, 누적으로 찍는 순간 그 위대함을 지워버린 기분이 들엏다고 한다.]이 점에서, 노모는 슬럼프를 겪고 있던 박찬호가 부활할 수 있는 목표를 제공해준 선수기도 했다. 이런 절친한 사이였던만큼 몇 가지의 일화가 있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와 계약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박찬호가 계약했다는 걸 안 노모가 인터뷰에서 "LA에 한인식당이 많은데 박찬호에게 안내 좀 해달라고 해야겠다." 라고 하자, 그걸 안 박찬호는 "지가 뭔데 나한테 안내해달라 말라임?" 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유들유들하고 ~~[[한화생명|콕콕 대며]] [[냉장고 나라 코코몽|코코몽]]한테 발리기도 하지만~~ 젊었을 때 [[박찬호]]는 본인 입으로도 그랬지만 ~~[[벤치 클리어링|이단옆차기 삑사리 내기도 했고]]~~ "좀 건방도 떨었고, 성격도 급한" 편이었다. 물론 건너가서는 잘 지냈으니 문제는 없었다. 소싯적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시절 그에게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찬호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실제로 포크볼은 야구의 여러가지 구종들 중에서도 특히 부상 위험이 높은 구종에 속한다. 노모가 포크볼의 위험성을 몰랐을 리는 만무하므로, 노모 입장에서는 이미 메이저 기준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포심을 가진 박찬호가 굳이 부상 위험이 높은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찬호는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시절 자신의 체인지업을 일본인 투수 [[기사누키 히로시]]에게 가르쳐 주는 대가로 그 포크볼을 배우려고 했다.~~ 절친한 사이는 계속 유지중인지, 공주시에서 열린 박찬호 기념관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9분밖에 말 안한 찬호형~~ [[https://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020&aid=0003178800|#]] 2021년 현재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프런트로 한솥밥을 먹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